미완의 걸작들에게 보내는 세레나데
----2019.3.4.----
미완의 걸작들에게 보내는 세레나데
사실 내 로망이기도 했다. 떠나는 날 아이들과 이별하며 칠판 한가득 메시지를 남겨 놓는 것. 그런데 참 주저하게 되거든. 떠나는 이가 남겨진 이들에게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거든. 그래서 편지를 쓸지 말지 고민했는데, 너희들이라면 곡해 없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마저 쓰기로 했다.
어떤 문장들을 남겨야 하나... 하다가, 그냥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어. 이 글을 읽을 무렵이면 개학 첫날일 테고, 그즈음엔 항상 뭐든지 물어보라는 수업을 했던 생각에. 너흰 참 사소한 것들을 물었던 거로 기억나네.
난 어쩌다 보니 선생님이 하고 싶었어. 그렇게 고등학교 지나고 대학에 가니, 정말 교사가 하고 싶어졌어. 의무감이 생길 정도로. 목표를 정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 보니 의미부여를 한 거지. 꽤 거창한 비유의 말들을 만들었던 것 같아. “난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야. 어지러운 길에 이정표를 세우고, 험한 길엔 쉬어 가게 의자도 만들어 놓고. 또 겸사겸사 연못도 가꾸고 꽃도 심고, 그늘지게 나무도 심어야지. 그래서 뒤에 오는 이가 이 길을 지날 때 쉬어 갈 수 있도록 해야겠어. 그래, 난 길을 걷는 게 아닌, 길을 준비할 거야. 누가 누가 지나가나, 어디로 달려가나 지켜봐야지.”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사범대에 진학하고, 뭐 열심히 살다 보면 어찌어찌 될 줄 알았지, 그때는.
그리고 참 어렸지. 지금 너희보다 한참 어렸어. 그리고 임용에 세 번 정도 떨어지는 시간이 흐른 뒤 서울 종로로 올라갔어. 공부도 더 할 수 없었고, 고향에 있을 수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 없이, 뭐든지 해야 했거든. 이때가 너희한텐 쉽게 얘기했던, 자세한 이야긴 생략했던 20대 후반의 암흑기야. 한 2년 조금 더 지나니, 힘들더라. 목표도 흐릿한 먼 지향만으로 모든 욕망을 잘라내는 일이. 하나 포기하면, 그만큼 내 일부가 사라지는 기분. 야간 PC방 알바를 하며 만난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두려워졌어. 그리고 이 일을 더 계속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4명이서 팀으로 계획하던 일을 접었어.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절박함의 온도는 달랐거든.
몇십장의 이력서를 내고, 초등학교 도서관 국어 인턴으로 가게 되었다. 도서관 사서를 하며 전 학년 논술 수업을 했어.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시작이지. 그래, 시작이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학교라는 것을 깨달았고, 초등학교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들이 참 좋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교직생활의 시작. 그런데 반년이 지난 2월에 난 또 쉰 장이 넘는 이력서를 써야 했어.
이번엔 고등학교 인턴으로 갔어. 기막힌 우연이지. 내 앞사람이 업무 인수인계 중 힘들다고 그만둬버려서 대타로 뽑혔거든. 그리고 소중한 누군가를 떠내 보내고, 고시원에서 고시원으로 이사하고. 나름 좋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거든. 초등 인턴에서 고등 인턴. 1년 뒤엔 기간제가 되었고, 1년 뒤에 담임이 되었고.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같이 일하시던 부장쌤들도 참 좋았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많이 배웠어. 그렇게 교사로 성장할 수 있었어. 내 교직관은 그 학교에서 거의 완성된 것 같아. 교사로서의 역량도 마찬가지이고. 그곳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것들이 많아. 경험이 없어 참 서툴렀거든. 학생 수가 너무 많은 학교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아이들도 있고... 뭐 그랬어. 지금도 눈에 밟히는 녀석들이 몇 있는데, 담임도 아녔는데, 한 주에 몇 번 수업하고 야자시간에 잔소리 몇 번 들은 걸 잊지 못하고 가끔 연락하는 아이가 있어. 녀석 참 가슴 찌르는 말 하더라고. 여태 학교 다시면서 쌤처럼 관심 가져 주는 쌤 없었다나... 이게 여기서도 내가 퇴근 못 했던 이유가 된 거지. 그 학교 아이들은, 내가 요즘 아이들에 대해 참 많이 고민하게 했어. 몇 십 년 경력의 선배 교사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요즘 아이들은 참 안쓰럽다. 희망이 없는 아이들이지 않냐. 우리 때처럼 그저 열심히 하면, 지금만 참고 견디면, 다 잘 될 거다.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이런 말 해 줄 수 없지 않으냐. 무엇인가 희망하고, 성취하고, 그런 경험을 물려주었느냐. 그런 시대를 만들지 못한 우리 어른의 잘못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교육을 욕한다. 학교가 공공의 적이지. 그래서 학교가 가해자가 되고, 학생은 피해자가 되지. 얼마나 학교 가기 싫겠어. 아이를 비참하게 만드는 얼마나 못된 말인가.” 참 아픈 말이지. 육아휴직하던 쌤이 반년 복직을 서둘러서 난 또 몇십장의 이력서를 내야 했고, 아이들과 작별인사도 없이 내려오게 되었어. 아이들은 이미 종업식 후였거든. 그래서일까. 3년이나 있던 학교인데, 출퇴근길에 정이 안 가더라.
쌘뽈의 첫인상은 단아함이었어. 면접 보러 오는데, 교문 앞에서 친구인지 기다리는 그 아이의 빨간 교복치마가 참 마음에 들었어. 여기 아이들은 뭔가 있다,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게 벌써 4년이나 되었네. 첫 해 녀석들은 지난겨울에 너희 멘토링 선배들이었고, 다음 해 녀석들은 이제 막 졸업했고, 그 다음이 너희들이다. 첫 학교 아이들에게 받은 느낌이 안쓰러움과 아련함이라면, 너희는 고마움과 미안함이야. 그래. 담임이었든, 아니든, 나와 많이 부딪혔든, 아니든, 너희 참 고마웠고, 그래서 많이 미안하다. 예전에 교지 신임교사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어. “너희는 던진 공을 받아주는 아이들이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던져주고 싶게 한다.” 너희 참 대단하고 멋진 아이들이야.
쌤 왜 가요. 나 그만둔다고 했을 때, 너희가 많이 묻던 말이야. 그땐 웃고 말았는데, 이제 대답해줄게. 쌤은 기간제니까. “시험은 하나의 자격일 뿐 교사의 자질을 보장하진 않는다. 나는 시험이 아닌 다른 기준에서 인정받을 테다. 아이들이 여기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 1년보다 아이들의 1년이 더 소중하다. 서른도 넘은 내가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 아닌가.” 이게 기간제 교사로서 내 자부심이야. 그리고, 그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 너희 덕분에 참 많은 것들을 해 볼 수 있었고, 더 하고 싶어졌고, 선생님으로서 행복했다. 그리고 참 미안하다. 특히 아픈 손가락들. 내 힘이 덜 닿은 아이들. 너희에겐 나 말고도 진짜 선생님이, 혹은 삶의 조력자들이 있어 보살펴 주시길 기원하마.
내가 너희들의 선생님으로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교사로서의 거리와 교사의 벽을 만들어야 했던 일이야. 가까이 다가오는 너희를 조금 밀어내야 했던 게 많이 미안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다행이지 싶다. 이제 몇 개의 벽은 없어졌으니. 갈 곳이 정해지거나 해야 할 것이 멀리 있지 않으면, 당분간 난 여기 있으려 한다. 너희의 고3 생활을 응원하고 있을게. 그리고 난 더 성장하려 한다. 지금 내 모든 것의 합보다 더 많이 성장하련다. 곳간을 많이 채워야 또 많이 돌려줄 수 있잖아. 일단 곳간 증축공사부터 하려 해. 분명 힘든 시기일 테지만, 너희 생각하면 힘이 많이 날 것 같다. 너희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마. 이게 내가 선택한 ‘쉼’이야.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아. 하지만 떠오르는 문장들이 죄다 수업 중 했던 잔소리니 생략한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 학교에서 행복하여라.
2019.3.
너희의 열여섯, 열일곱에 함께 해서―
사족: 이 편지는 1학년 반장이었던 가은이가 처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