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잠
며칠 추웠다. 후드를 눌러쓰고 집 문을 열면 그제야 마스크에서 올라온 습기에 앞머리에 이슬이 맺혔음을 깨닫고 이젠 안경 안 쓰지 하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월초 한파에 수도관이 터졌다. 그래서 온수도 끊겼다. 세탁기는 얼어 봤어도 이런 적은 또 처음이었다. 가난엔 이자가 붙는다는 문장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랬다가 또 며칠 날이 풀리니 마치 겨울이 다 지나간 듯 또 마음도 풀린다. 지난 학기는 연구실로 출퇴근인지 등하교인지 모를 뭔가를 했다. 무엇보다 학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논문이란 과제를 가슴팍 돌덩이마냥 늘 한 켠에 달고서 연구는 인적 네트워크란 말을 실감하며 그리 몇 달을 살았다. 8월 즈음부터 왼쪽 어깨가 참 아팠는데, 여태 낫지 않고 있다. 잠 못 이루는 뒤척임의 이유이리라.
떠올리고자 하면 떠오르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있다. 몇 살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등에 업혀 앞밭에 있었다. 여기가 우리 밭이고, 저기가 우리 집이고, 등과 어깨 너머로 약간 푸른 안개에 잠긴 마을이 보였다. 옛적에 우리 집은 초가에 기와를 얹은 형태였다. 세 칸 방에 광이 딸려 있고 싸리나무 울타리에 아궁이 솥단지가 하난지 둘인지 있었다. 장롱 서랍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찾은 마을 길 넓히기, 초가지붕 들어내기, 뭐 이런 교과서 삽화 같은 기록이 신기했다. 동네 어느 집이든 흙담에 삐져나온 볏짚과 온돌 굴뚝에서 먹처럼 묻어나오는 그을음이 흔했다. 뒷집은 소를 키웠다. 좀 멀찍이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할아버지와 족보에서 내 이름을 찾던 기억도 있다. 날 학자로 키우겠다며 일보다 공부가 우선이라 하셨다. 그 기대가 스며들어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누이면 뉘는 대로 업으면 업는 대로 잘 자던 아이라 했던가. 유모차 지붕에 햇볕 쨍한 처마가 보였다. 또 그 쨍한 마당을 뒤로하고 마루 넓게 편 흰 면포에 밀가루를 뿌리며 국수 반죽을 밀던 어머니가 기억난다. 종이에 불을 붙여 곤로에 옮겨 넣는 기술을 따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쟁반 가득 담긴 콩가루를 한 주먹 뭉쳐 주시면 둥지서 입 벌리는 새끼 제비 모양을 하고, 겨우 허리께에 눈이 닿던, 하지만 그 떡 이름이 인절미인지도 모를 그런 때였다. 또 언젠가 숙모가 밥상을 차려 주셨는데, 갓 지은 밥 위로 날계란을 까 주셨다. 낯선 음식에선 비린내가 날 것 같았고, 그래서 비리다며 징징댔었다. 동생보다 어린 사촌 동생과 한 지붕에 살았다. 무슨 이유로 그리 먹고살기 힘들었을까. 큰집에 부모 없이 사는 동생의 마음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냥 동생이지 뭐. 형의 소심함이 옮아 미안하다. 매년 설에는 함께 연을 만들어 날렸다. 녀석들은 그때를 어찌 회상할까. 그 시절엔 집에서 인삼 농사를 지었는데, 마당에 고무 다라이 가득 담긴 딸(빨간 껍질의 인삼 열매를 그리 불렀다)을 이불 빨래하듯 밟던 기억이 있다. 자기 전 누워 있으면 밤늦게 돌아오시는 아버지 경운기 소리를 용케 알아맞혀 용하단 말도 들었던 듯싶다. 1학년 때 수수깡이 준비물이었는데, 등교 직전에 정말 집 앞의 수숫대를 뽑아 들고 갔던 기억이 있다. 격년에 한번 팔목이 부러졌던 육촌 친구도, 파란 감을 따서 콘크리트 바닥에 선을 긋고 놀거나, 병뚜껑을 돌로 찧다가 손톱을 찧기도 하고 뭐 그랬다. 운동신경이 없어도 자치기 2단을 양손을 쓸 수 있었고, 깍두기로 껴 어느 팀에서도 놀 수 있었다. 개구리알을 주워 키워보기도 했고, 공 대신 깡통을 찼고, 담 너머 호통치던 옆집 아저씨도 있었다. 마루 광에 숨어 놀다가 해 떨어지면 불안해하기도, 집 앞의 전봇대가 넘어진다며 이사가자고 조르기도, 할아버지 쓰러질 때도 다른 세상 풍경처럼 생경해 하기도 했던 시절.
열 살에 벽을 허물고 집을 다시 지었는데, 당시 입식 부엌이라는 게 유행이었다. 한참 뒤에 알았지만, 할아버지 당신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라 그 기둥을 해치지 않으려 했다던가. 할머니 돌아가시고 십 몇 년이 훌쩍 지나서야 지붕을 새로 얹었는데, 밤마다 지겹던 쥐새끼들의 질주 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아 속 시원하단, 어머니의 전화 너머 푸념이 떠오른다. 그 공사하던 몇 달 여름을 마을에서 교장 할아버지로 통하는 분의 사랑채에 얹혀살았다. 그분을 몇 번 뵌 것 같은데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소풍 갔다 와서 마당 세숫대야에 물 먹으면 커지는 색색이 공룡을 담가 놓았던 기억, 나무 그늘이 시원한 마루에 걸터앉아 장난감 1호와 2호를 투덕투덕 싸움 붙이고 놀았던 기억. 햇살 드리운 방바닥에 뒹굴뒹굴 화랑 관창의 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읍내에 외삼촌 댁이 있었는데, 놀러 갔다가 극화 삼국지 12권을 얻어왔다. 삼국지는 그리 읽었다. 친구 집에 가서는 빈 방에서 서유기를 읽었었다. 옛날 일은 사진처럼 기억되나 보다. 향수에 음식 냄새를 곁들였던 백석처럼, 추억은 다른 감각으로 전이된다. 꼬맹이 시절의 악몽이 있다. 동화 속 풍경에서 나비를 따라 초록 들판을 폴짝거리다 보면 어느새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고 눈코입 달린 거대한 산맥이 솟아나 날 겁박하는 일련의 이야기. 온몸의 감각이 답답해져 꼼짝 못 하다 잠에서 깨어나는 꿈. 그 짓누르는 억압감이 잔여물처럼 남아 꽤 오래 식은땀 비슷한 걸 흘렸더랬다. 소설 장마에서 삼촌이 온 날 밤 깨어버린 나의 이야기와 꼭 닮은 광경이다. 그 꿈은 대학에서 프로이트를 공부한 뒤 더는 꾸지 않게 되었다.
국민학교는 걸어 다녔는데, 중학교는 그거 조금 더 멀어졌다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집이 산 중턱이라 등교길은 내리밟으면 15분에 끊을 수 있었고, 반대는 30분이 족히 걸렸다. 아랫마을에서 시작하는 긴 긴 오르막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오를 수 있게 된 건 1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지금껏 버티고 사는 체력은 다 그때 길러진 거겠지. 한 해에 주먹 하나씩 키가 컸는데, 무릎이 너무 아파 할머니 쓰시던 겔 형태의 관절약을 몰래 바르곤 했다. 성장통인걸 그땐 몰랐다. 키도 작았고, 눈도 나빴다. 2학년 때 수학 시험을 봤는데, 칠판에 적힌 문제를 잘못 옮겨 적어 나 혼자 어려운 시험을 치렀었다. 그래도 틀린 건 틀린 거라며 매를 들고 꼭 안과에 가라던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건너편엔 나만 보면 웃으며 놀리던, 싫지 않은 국어 선생님도 있었다. 눈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다. 한 학년이 겨우 쉰 명 언저리인, 교복을 입고 다녔던 중학생이었다. 이름도 잊은 친구들도, 약간 동경하던 친구도, 닮으려 한 선생님도 있었다. 부모님을 따라다녔던 성당을 꽤 열심히 다녔다. 복사단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이별이 참 많았다. 버스에서 내리다 건너편 차에 치인 친구도 있었다. 작은 학교라 해마다 선생님들 대부분이 바뀌었다. 작은 본당이라 신부님도 오래 계시지 못했다. 기타를 가르쳐 주거나 같이 농구하고 무한정 분식을 사 주시던 신학사님도 그랬다. 주위에선 인연을 뻗어가고 특별한 지점을 만들어 기억하고 그랬던 것 같다. 만약 사람에게 연을 맺는 촉수라는 감각이 있다면, 내 신경망은 무디다. 무디다 못해 수축한다. 성게나 달팽이 눈처럼. 그래서 애초에 이별의 슬픔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 꿈도 자주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옛날 기억이다. 지금은 없어 못 먹는 파와 마늘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냄비에 온전히 감자만 넣은 빨간 찌개를 종종 끊이셨고, 나와 동생을 그걸 참 좋아했었다. 그때는 재료 본연의 맛이란 거에 조금 집착했었다. 언젠가 반찬 투정하는 동생에게 콩자반 종지를 집어 던졌는데, 할머니의 지 애비 그대로 박았단 말이 오래도록 가시가 되었다. 사춘기의 반항은 바늘의 끝이 요상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나 보다. 아직 정체를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성적순 입사 대상은 아녔던 거 같은데, 학년 초 결원이 생겨 담임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튕기는 척만 했던가. 7시 첫차 타고 온갖 아이들과 치이는 게 싫어서였나. 지금도 가끔 새벽 어스름 학교에 가려고 자전거 타고 집을 나서는 앞뒤가 안 맞는 꿈을 꾼다. 꼭 비나 눈이 내리고 있고, 자전거는 굴러가지 않는다. 바퀴에 바람이 빠졌거든. 정류장 직전에 백여 미터 직선 길이 있어 반대편에서 버스가 서고 가는 게 보이는데, 모퉁이를 돌면 늘 저기서 먼저 출발하는 버스가 보인다. 저걸 타야 하는데, 참 오래된 악몽이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마감이 임박한 상황에선 여지없다. 기숙사는 무슨무슨 학사라고 불렸는데, 말이 기숙사지 옆에 붙어있던 중학교 건물을 빌린 교실이었다.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식당과 사감실을 만들어 놓았다. 독서실 책상 32개를 넣은 교실이 넷 있다. 앞뒤로 8개, 중간 기둥을 중심으로 8개씩 맞대어 붙여 놓으면 한 교실이 두 공간으로 쪼개진다. 각각에 여남은 명씩 살았다. 옷가지와 이불은 책상 위아래에 쟁여놓고 잘 때는 바닥에 한 줄로 누워 잤다. 누운 자세 그대로 일어나는 잠버릇이 그땐 조금 도움이 되었다. 형들이 깰까 봐 자다가 쥐가 나도 소리도 못 냈다는 무용담은 누구나 갖고 있었다. 학교 화장실에 샤워기만 달아 놓았다. 변기가 막혀 모두가 처치 곤란일 때 어느 3학년 형이 고무장갑을 끼고 퍽퍽퍽 해결하고 휙 사라지던 기억이 있다. 서울대 간 이과 형이었는데, 언젠가 야자시간 내내 상대성이론과 뉴턴역학으로 씨름하던 형들이, 드디어 결론을 냈다고 노트를 보여주며 검토 바란다던 그런 형이 있었다. 가끔 말 그대로 이불 보따리를 들고 집에 오기도 했다. 버스에선 창피함보다 귀찮음과 무거움이 싫었다. 교복은 주말에 수돗가에서 해결했다. 세탁기는 여자화장실에 있어 쓸 수 없었다. 교복 셔츠를 손빨래하고 주름지지 않게 펴 말리는 법을 배웠다. 딱딱한 의자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형들에게 등허리 마사지하는 것을 배웠다. 난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해결했다. 한 달에 한 번 귀가인데 적당히 무시했다. 집에는 안 가고 성당에서 미사만 보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최근까지도 빈 성당에 혼자 앉아 있는 걸 즐겨 했다. 어둡지만 어둡지 않은, 색유리가 흐르는 공간에 어떤 방향성이 있어 좋았다. 학교에 도서관이 있긴 한데 문 여는 걸 보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빠듯하게, 뚝방길을 따라 군립도서관에 가는 걸 즐겼다. 어느 일본인 과학자가 쓴 이론서를 읽고선 빛과 차원의 성질에 대해 이과 친구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 달라 졸라서 매일 영어 듣기평가를 했다. 물론 앞뒤로 FM 라디오를 더 열심히 들었다. 어찌 살았나 모르겠다. 그래서 죄다 버텨내지 못했는지 2학년 때까지도 우리 학년은 나 포함 넷뿐이었다. 그래서 별 눈치 보지 않고 살았다. 주말에든 방학에든 기숙사 방바닥에서 뒹굴거려도 운동장 어디서 뭘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청소가 귀찮았다. 매일 등교 전 화장실 청소를 해 놓아야 했다. 힘들진 않았다. 복도 청소도 전담해야 했지만, 수능 치르는 형들에 비해 뭐 얼마나 대단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3학년이 되었는데, 그래서 인원이 확 늘었다. 뭔가 싫었다. 짬부심이었는지 경력 우대를 기대했는지. 모든 청소를 1/n하라는 규칙이 싫다며 퇴사했다.
군청에서 예산을 핑계로 첫차 배차를 줄여 늘 0교시 보충에 지각했다. 그때 버스요금이 지금보다 비쌌다. 자정까지 야자를 했는데 아랫마을 아이들의 통학용 승합차를 빌려 탔다. 눈치가 보여 늘 중간에 내려 걸어 집에 왔다. 가로등 없이 깜깜한 길이었다. 무섭진 않았다. 별이 많이 보여 좋았다. 패닉의 달팽이가 참 좋았다. 그러다 옆집 아저씨의 퇴근 트럭을 타고 오게 되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수능금지곡쯤 되는 트로트를 늘 들어야 했다.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다시 기숙사 입사하는 꿈을 꾼다. 의자를 밟고 책상에 올라서 천장 기둥에 옷을 건다. 늘 시내로 사라졌다가 만화책과 무협지를 한가득 빌려 등장하던 친구의 사물함이 내 것이 된다. 뒤늦게 입사한 친구놈이 보며 웃는다. HOT를 좋아하던 단짝이 뭐 이제 왔냐, 그럴 줄 알았단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 자리에서 등으로 말한다. 그토록 싫어했던 담임 겸 사감이 들어올 때쯤 잠에서 깬다. 2년의 기숙사 기억은 꿈같다. 그래선지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건 앞뒤가 불분명한 1년의 순간이다. 난 버스에 타고 있고, 졸고 있고, 비도 오고, 그 아이는 정류장 밖에 있고. 안 보면 멀어지는 게 아니라 안 볼수록 간절해지는 그런 기억. 뭐가 진짜인지 만들어낸 허상인지 그것도 불분명하다. 대학 자취를 하며 오랜만에 집을 찾을 때면 버스에서 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새벽에 기숙사 창에 붙어 있으면 빈 운동장 느티나무 경계 위로 은하수가 흘렀다. 집으로 걷던 밤길에서 별자리를 익혔다. 별과 우주라는 월간지의 성도를 보면 6등성까진 찾을 수 있었고, 보지 않고도 북반구 60좌 정도는 쉽게 읽어 냈다. 지금은 눈도 나빠지고 하늘도 흐려져 별자리마저 잊었다. 한겨울 유성우가 내린다며 새벽까지 있었다. 동아리 친구들의 투덜거림을 희생해서 오리온 허리를 쌍별똥이 가로지른 순간,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구슬 같은 이미지를 얻었다. 물병자리 제타를 좌표로 메일 주소를 만들었다. 또 언젠가 개기월식이 있는 날 부모님 몰래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월식 전후로 하늘이 보름달로 가득 차 있었다. 햇살처럼 달빛이 내리며 바닥에 부딪히고 쪼개졌다. 빗물이 땅에 스며들 때 그러하듯 밤하늘 가득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소리에 표정이 있었는지 내 얼굴에 닿아 따끔거렸다. 자정께 뜬 붉은 달에 나의 빛이 가 닿은 듯했다. 윤동주가 이해됐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이었다.
대학은 연 200 자취를 했다. 부모와 함께 집을 구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층 가정집의 1층에 세를 들었는데, 공용 화장실과 공용 세탁기를 써야 했다. 집이라기보다 방이라는 느낌이었다. 밥솥에 밥물을 맞추는 게 썩 익지 않았다. 몇 번은 라면 스프를 남겨서 스프국을 끓였던가. 과대가 집을 구하기까지 개강하고 몇 주는 함께 살았다. 자꾸 그 짧은 순간을 떠올리며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는데, 내겐 너무 예전 기억이다. 학교 후문을 따라 상가와 월세방이 가득했고 골목골목 떡볶이 포장마차의 주황빛이 따라 이어졌다. 닭꼬치를 처음 먹어 봤다. 고3 때 따르던 형이 수능 응원으로 사 주었던 감자탕에 애착이 생겼다. 순대국밥엔 새우젓 간이 정석이라 배웠다. 가끔 한적한 주말 낮엔 근처 자취하는 후배를 불러내 밥을 먹었다. 한참이나 뒤에도 겸연쩍게 그 얘길 꺼내 줬다. 소모임 형들 집에서 밤새 떠들고 놀고 강의실에서 졸고, 뭐 그랬다. 혼자라는 생각이 있었나 보다. 깎이고 붙고 쌓이고 하며 사람과의 자극에 예민했나 보다. 소모임 형들, 누나들, 동기들이 없었다면 나의 스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으리라. 뼈해장국과 순대국밥엔 그것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의 추억이 있어 따뜻하다. 군대를 가고, 전역을 하고, 같은 집에 다시 세 들었다. 그간 리모델링을 해서 다행히 집은 좀 더 깔끔해졌지만 방은 불을 켜지 않아 늘 조금 어두웠다. 컴퓨터도 생겼다. 사람 목소리가 그리워 mini를 자동실행 프로그램에 등록해 놓았다. 이소라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배철수도 간간이 챙겼다. 무를 썰어 육수를 내 국과 찌개를 끓였고, 가끔 그 맛이 너무 좋을 때면, 외로웠다. 부침개도 종종 만들었다. 학식은 형편없었다. 뭐 먹을까 고민하는 시간, 먹고 치우는 시간이 아까웠다. 영양 균형도 조금 걱정했다. 수험생 생활을 하며 월식을 시작했다. 가끔 주인아주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가게 문을 닫던 날 물기 가득하던 동그랗게 작던 그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리틀포레스트는 종일 밥 먹는 얘기만 하는구나 하고 감흥이 없었다. 길거리 떡볶이가 사라지듯 잔디밭 주당들도 자취를 감췄다. 술집에서 안주를 시켜야 후배를 볼 수 있었다. 고민의 깊이는 만남의 시간과 비례해 얕아졌다. 함께 토하지 못한 열변을 다들 속으로 주워섬기며 많은 것들이 와해되고 있음을 느꼈다. 쓸쓸했다. 다만, 유일한 남자 동기와 지독히도 붙어 다녔다. 아침에 먼저 원룸촌에서 올라오면 같이 도서관에 가고 수업 듣고 밥 먹고 신문보고 공부하고 강의 듣고 밥 먹고. 가끔 철권과 위닝의 2 player가 되어 주던, 강풀의 웹툰을 추천하던, 생각할수록 고마운 녀석이다. 군대를 다녀오고도 천성을 잃지 않았고, 자신을 숨기고 토론할 줄 아는, 선함을 바탕으로 날카로웠던 벗이다. 불면증이 떠나지 않았다. 새벽 3시까지 잠을 설치면 길 건너 동아리 동에서 예배 소리가 시작된다. 임용 재수를 학교 도서관에서 하며 전공 청강을 했다. 교수님의 자넨 아직도 학교에 있냐는 소리도 들었다. 천재는 늘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 쓰레기 같던 사람을 헤치면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다. 닮고 싶은 형들도 존경하던 누나들도 만났다. 나의 20대를 요약하면 자기표현 네 글자가 남겠지. 삶의 꿈과 하루의 꿈이 크게 다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낱 무지렁이던 머리가 틔었고, 사람들 속에 고독했고, 늘 어떤 누군가가 되려 힘겨웠다. 배고픔보다 다수 중 하나가 되어 사라지는 존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른이 손에 잡히는 시간으로 다가왔다.
20년대 시인들 사이에서 침잠沈潛이란 어휘가 유행했다는데, 나도 그러했다. 생각이 탁해질수록 눈빛이 죽을수록 사소한 일탈이 전부가 되기도 한다. 웹툰으로 요일을 알고 온라인으로 대화하고. 고향 집에서 삼수를 하며, 아들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고 그런 존재가 되었다. 롯데리아에서 맛없는 햄버거를 넘기며, 창밖에 그림자로 스쳐 가는 동창을, 도서관 열람실 뒷모습의 저 누구와 동일 인물이라 상상했다. 고등학교 등록금을 부모란 작자가 술값으로 날려버려 상고로 진학한 다른 동창을 기억했다. 그가 결국엔 사범대를 갔다던가. 문득 시내까지 왕복하는 버스 요금이 아까웠다. 나의 경제관 역시 묘하게 뒤틀렸다. 먹고 사는 문제를 포도 순을 따며, 농약 줄을 당기며 생각했다. 할머니의 마지막과 아버지의 작은 등과 어머니의 울음을 오래 기억했다. 나의 유산을 속으로 삭였다. 숙부와 갈등으로 집안 전체가 목소리를 잃게 되었고, 난 독립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오시던 아주머니들이 쥐어 준 십 몇만 원을 쥐고 서울로 올라갔다. 목수 출신 PC방 주인 형이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고, 설레발 가득 인테리어공 친구, 사연 가득한 명문대 출신 동생이 뭔가 하려 모였다. 1년 반 정도를 거기 가게에 얹혀살았다. 3층 커플실에 딸린 게임룸을 개조했기에 손님들이 불쑥 커튼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교대 시간이 되면 화장실에서 씻고 2층 카운터로 내려갔다. 야간 손님을 구경했다. 몇백 시간 선불한 멀끔한 회사원, 게이바는 유해하지 않다며 접속 차단을 풀어달라는 손님, 매일 막걸리에 취해 매번 다른 손님의 손을 잡고 나가던 여인. 그들의 삶을 조망했다.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청계천 따라 걷기도 했다. 내게 그 광경은 야경뿐이다. 헌혈을 주기마다 했다. 뭔가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아 좋았다. 30분 넘게 성분헌혈을 하면 담요를 챙겨주는 간호사의 배려가 좋았다. 다르려 했던가 같지 않으려 했던가. 하려고 한다고 마음만 먹는다고 뭔들 할 수 있겠나. 종로 PC방에 모였던 그들은 준비만 하다 모두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월급인지 용돈인지 15만 원씩 모은 돈으로 고시원을 얻었다. 우리 행성 위에 드디어 구한 사적 공간이었다. 당시 학교 인턴은 월 120이었다. 그다지 적게 느껴지진 않았다. 군대 첫 월급이 17,500원이었으니까. 일당 커피 석 잔에서 많이 올랐지 뭐. 다만 군 기간을 소급해서 국민연금인지 의료보험인지를 두 배 징수하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퇴근길은 걸어서 30분이었다. 길 건너 보이는 수지와 분당의 마천루는 그저 풍경이었다. 학교에서는 베이커리 쿠키가 간식이었지만 고시원에서는 무료제공 라면이 떨어졌다며 관리인을 찾아야 했다. 딱 그만큼 거리감을 느꼈다. 경기도는 너무 넓었고, 고향 집은 더 멀었다. 두 뼘 창문 너머로 늘 생각했다. 난 꼭 큰 창문 큰 욕조 있는 집에서 살 거야. 직장을 옮겼다. 보증금이 없어 고시원을 찾았다. 방에 개인 냉장고는 3만 원, 창은 5만 원이 더 있어야 했다. 공용주방에선 늘 뭔가 없어졌고, 세탁기는 종일 돌아갔다. 한 층에 방이 백 개는 될 터인데, 공용 화장실에 공동 샤워실 꼭지는 두 개뿐이었다. 옷장과 책상은 일체형이었다. 그 밑으로 어린이용 침대가 놓인다. 빨래는 거미줄처럼 건다. 눅눅하고 습한 냄새가 매달린다. 어디든 앉으면 손끝에 벽이 닿았다. 모로 누워 자는 습관이 생겼다. 국민학교 때 단체기합이 떠오르며 목뼈가 저렸다. 큰맘 먹고 메모리폼 베개를 사고 불면증이 사라졌다. 이삿짐을 줄이고 줄였다. PC방 정리하며 얻은 데스크톱 놓을 곳이 없어 노트북을 샀다. 거기 앉으면 지하철 지나가는 게 보인다. 먼지가 들러붙은 회색빛 도시가 반짝이고 멀리 산, 너머 하늘이 흐릿하게 보인다. 방음이 잘 되는 곳에서 살 거야. 자다 깨어 벽 치는 짓 그만할 거야. 티끌 모아 티끌이지만 잘 모으면 눈에 거슬린다. 어찌하면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고. 이즈음에 뒤꿈치 각질이 두꺼워졌다. 군대서 생긴 새끼발가락 무좀이 떠올라 싫었다. 건물 가득 피곤한 PC방 야간 손님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어느 해인가 응시료가 없어 임용을 치지 않았다. 짝꿍 선생님이 난 마트 알바라도 했다, 했다. 3학년 과대의 노가다라도 해서 졸업여행비 내겠단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저녁 급식을 챙겨주는 부장님이 계셨다. 망나니들이 많아서였는지 식사 후 학교 인근 산책하는 문화가 있었다. 담 넘어 어딘가의 구석에 숨는 아이들에겐 적절한 CCTV가 되었겠지. 상가와 슬럼을 낀 3단지와 숲과 문화센터를 낀 8단지의 격차는 아이들이 그대로 닮았다. 그래도 아파트 단지 사이로 가로수길이 썩 운치 있었다. 그 산책 루틴이 그대로 출퇴근길과 겹쳐 지겨웠을 만도 한데 그 길엔 끝내 정붙이지 못했다. 늦은 퇴근길에 가끔 덜 늦은, 용달로 파는 야채순대는 좋아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오일장이 선다. 그게 주말과 겹치면 출근길엔 옥수수빵 한 덩이, 퇴근길엔 타꼬야키 한 접시를 샀다. 방학엔 가끔 혼자 조조나 심야 영화를 봤다. 가깝다는 이유로 근처 크린토피아와 수선집이 소중했다. 신분 보장되는 여초 집단은 괴물이다. 공격성은 엉뚱하고 자신이 무엇을 짓밟는지 깨닫지 않는다. 세 자리 수 이력서를 내고, 거기가 어디라고요 물으며 이사했다. 보름도 안 걸렸다.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했다. 야자시간에 잔소리해줘 고맙다 한, 인사도 못 한 아이들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익숙함과 무뎌짐은 조금 많이 달랐다.
필로티 구조 2층에 집을 구했다. 창도 컸고, 베란다에 세탁기, 천장 부착식 건조대도 있었다. 모서리 집이라 환기는 잘 되었지만, 겨울에 지독히도 추웠다. 라텍스 매트릭스는 난방이 불안하여 맨바닥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데 몇 년이 더 걸렸다. 석고보드 건너 세입자는 자주 바뀌었다. 새벽 1시마다 신음이 새기도, 주말마다 중국어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도, 윗집 코골이 옆집 폰 진동 소리도 들렸다. 스포츠 댄스를 즐기는 이웃은 한번 찾아가 초인종은 눌렀다. 뭐, 퇴근하면 자정이고 자다가 벽 칠 정도도 아니어서 이런 것들이 살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주말엔 점심 즈음 눈을 떴다. 카페인 두통이 깨워 주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대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한다. 혹 오늘 학교 오냐며 톡이 오기라도 하면 잠깐 고민했다. 저들은 제 할 것 하고 나는 나 할 것 했지만 그냥 교무실에 누가 있다는 게 안정감을 준다나. 사실 업무보단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좋았다. 수업 준비라도 할까 책 펼치면 불쑥 찾아와 방해하는 무구함을 반겼다. 빈 교실, 빈 강당, 빈 운동장, 그리고 뭔가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뒤통수 보는 게 좋았다. 마룻바닥이어서였는지 실제 그러하였는지 햇볕 가득한 공간이었다. 정이 많이 붙어 내 머물 곳이라 착각했다.
지금 이곳은 아파트 1층이다. 많이 시끄러워도 담배 냄새가 흘러와도 그러려니 한다. 창도 크고 욕조도 있으니까. 9평 원룸엔 건조대를 놔도 동선이 남는다. 집에 묶여 있는 시간이 늘어 살림살이가 늘었다. 읽지 않은 책들이 늘어간다. 이사하려면 큰일이다. 웅크려 자는 잠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바로 누우면 벌서는 듯 목이 뻐근하다. 왼쪽 어깨가 결리니 오른쪽도 아프다. 베개가 영 불편하여 불면증이 도졌다. 그것의 보상인지 꿈에선 소설책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늘은 속편이고 이번엔 프리퀄인가, 앞뒤로 스토리가 짜 맞춰지기도 한다. 어디 적어둬야지 하지만 세수하다 잊는다. 군대 꿈은 이제 그만 꾸었으면 한다. 말년휴가 복귀했는데 이등병때 선임들이 있는 플롯은 클리셰라 효과적이다. 요즘엔 뜬금없이 수업하는 꿈을 자주 꾼다. 목소리가 안 나와 악을 쓰는 빈도가 늘었다. 꿈에서도 텍스트가 잘 읽혀 자각몽인가 한다. 자각하면 뜻대로 뭐라도 하지 쫌. 그래서 타로를 다시 찾는다.
해 뜨는 아침의 파란 하늘은 누구 말마따나 슬프다. 저녁놀이 좋다. 울음이 타는 순간의 십여 분을 마법의 시간magic hour이라 하던가. 집으로 돌아가는 하늘도, 집에서 내다보는 하늘도, 서향이라 좋다. 집다운 집이란 무엇일까.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잠을 잘까. 꿈은 하루의 끝일까 시작일까. 누구를 품어줄 수 있고, 누구에게 안길 수 있을까. 정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