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려던 글을 새치기한 까닭은. 어제 본 스케치북이 마음을 두드렸기에. '이자람'님은 막연히 동경했던 분이고, '이날치' 분들은 관광공사 홍보 영상으로 잠깐 접했었다(스페이스 공감에서 언뜻 보았던 것도 같고). 수업 시간에 뮤지컬 '서편제' 중에서 심 봉사 눈 뜨는 장면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도 떠오르고, 또 나보고 말 빠르다고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표정도 떠오르고 해서 이걸 꼭지로 뭐라도 끄적이고 싶었다.
프로그램 끝나고 위키에서 조금 찾아봤다. 이자람은 워낙 대가이기에 그렇구나 했는데, 이날치의 면면을 찾아보니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 범상치 않은 이 없는, 다들 자기 영역의 고수였다. 인터뷰 중에 '재미있고 동경하던 것들이라, 좋아서 한다...(이자람)', '영정조 시대와 대원군 시절의 판소리가 달랐듯, 우린 21세기의 옷을 입고 있다...(이날치)'라는 표현이 훅 와 닿았다. 웃음에 여유가 묻어난다 느낀 건 자기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 아르릉대는 멍멍이와는 다르게 보여서일까.
판소리의 외연을 넓히려면 어찌해야 하나. 둘은 같은 고민에서 출발하여 다른 선택에 이른 것이 아닐까. 이자람은 사설을 서양 소설로 대체하였고, 이날치는 힙한 비트에 판소리 사설을 얹었다. 결론의 다름은 무엇에서였을까. 전자가 반 세대 먼저였기에? 후자가 7명의 팀이라서? 지금에 이르게 한 연(緣)을 따지면 후자가 더 많겠지. 먹고 사는 입이 많아서겠지. 그래서 조금 더 빛나 보였다. 빛이란 무릇 꺼짐을 전제하고 있어 아름다우니까.
그리고 이 문장이 떠올랐다. '역시 세상은 엘리트가 바꾼다.' 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잘난 놈들에겐 늘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려 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순수함을 요구했다. '큰 사람일수록 파급력이 더 크잖니. 그래서 세상에 더 많은 영향을 주지 않겠어?' 볼이 나온 아이들을 이렇게 위로하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던 거 같다. 역사는 영웅의 서사시이다. 유물론이든 실증론이든 역사의 교차점에는 늘 민중의 역량이 집결된 무형의 흐름이 있었고 그것을 실체화하는 영웅이 존재했다. 하지만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했듯, 영웅은 시대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저 힘센 목동일 뿐. 난 너희가 우리가 필요할 때 준비된 사람이었음 했다. 세계평화나 미래세대의 짐을 짊어진 이런 거창한 우리도 좋지만, 그보다 친구, 이웃, 사랑하는 사람, 이렇게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오는 소중함을 느끼는 어른이 되길 바랐다. 문학으로 얘기하자면, 타자에 공감하는 주체의 삶. 그런데...그 필요할 때, 연이 닿는 접점에. 선택하고 행동하는 순간에, 준비되어 있기가 참 어렵더라. 마치 붉은 여왕의 역설처럼 쉽지 않더라.
지난 학기 진로교육론 기말 과제로 이런 글을 썼더랬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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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겁쟁이. 어떤 방법으로 마음의 잠금을 열 수 있을까?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떻게 오늘을 살래?" 영화에서는 'Aal izz well'이란 주문이면 모두 해결이 되었지만, 역시 우리 세상에는 두려울 것들이 많다. '실패할 자유마저 없으니까'라던 생각을 '그래도 도전은 조금 다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까. 일단 짚고 넘길 점은, 극 중 얼간이로 묘사되는 이들도 최고 명문 대학의 공대생이라는 점, 그중 열정에 가장 충실했던 란초가 능력만큼은 최고의 엘리트였단 사실이다. 여기서 조금 다른 시사점을 찾고 싶어졌다. 다른 세상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와닿지 못한다.
언제까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다시 성장하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무엇을 바꾸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기왕이면 그 분야의 최고 능력자여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A가 되려 A를 비판하지만, 막상 A가 되고 나면 올챙이 적 기억을 잊는다. 개구리가 되지 못하면 비평은커녕 한탄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인류의 문명은 흐름이지만, 각 특이점에는 그 역할을 해 줄 영웅이 필요하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이 흐름을 이겨낼 유연함과 방향을 잃지 않을 굳건함'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란초는 다 스러져 가는 라주의 집안 풍경을 "소파에선 싹이 자라고 천장은 24시간 물을 준다."고 묘사했다. 여기서 힌트를 얻자면, 적어도 학교의 진로교육에는 멀리 내딛는 힘보다 발밑을 살피는 섬세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손잡고 힘차게 나아가는 추진력보다 길옆의 민들레에 까르륵댈 친구가 되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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