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읽는 니체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본 니체의 잠언을 통해 세상의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배운다!현대인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버겁고 험난하다. 너무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과 곳곳에서 부딪히는 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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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다.
몇 년간 손 닿는 곳에 꽂아 놓았던 책인데, 너무 부끄럽다. 완독이 너무 늦었다. 나는 철학서를 좋아한다. 읽지 않아도, 책장에서 책등만 보아도, 혹 그저 펼쳐 놓기만 해도 그 금언과 낱말들이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나는 철학서를 좋아한다. 돈 쓰는 것을 마치 삶을 깎아내는 듯 거리끼지만 어느 영역에선 헤퍼짐이 거침없는데, 오래 보아 둔 책을 살 때 가끔 그러하다.
방금 한 소리가 무색하게 도서 구입에서 저자를 꼼꼼히 체크하는 편이다. 허들은 낮지만, 출판사도 따져 본다. 위의 책을 안 지는 꽤 오래되었다. 내가 먼저 소개했는지 아이가 먼저 보여주었는지는 시간 순서가 기억나지 않는데, 옆에 찾아와서 'amor fati'라는 개념이 참 마음에 든다며 흡족하게 재잘대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래서 난 유행가 '아모르 파티'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다.) 또 몇 년 간 나름 목록을 만들어서 캐비닛 책장 한 줄 가득 책을 꽂아두고 기특한 녀석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곤 했는데, 그중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가 있었다. 아, 또, 부끄럽다.
자기계발서를 혐오한다. 뜻이 많이 변질된 혐오라는 단어의 원색적 의미만큼 싫어한다. '나무야 미안해'라는 밈이 절로 떠오를 만큼 지식소매상을 무시한다. 수백 년 전 장사치를 업신여기던 시선만큼 그들을 천히 여긴다. 그러니 저 두 단어가 조합되면 하염없이 하찮게 느낄 밖에. 모순되게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장이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 인문학 장사치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마치 빈 수레의 그것처럼, 호랑이 없는 굴의 토끼처럼. 무슨 자신감이고 어떤 뻔뻔함일까. 그들의 무게 없이 내뱉는 말들이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 강사 앞에 사고를 멈춘 청중들은 소피스트를 좇고 있을까, 피리 부는 사내를 쫓는 걸까. 아니면, 그러고 싶은 걸까.
이 책이 그러하다. 책에 대한 거리낌만큼 그것을 추천한 자책이 되었다.
예전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요청이 있어도 나의 말을 녹음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고 집중해서 들으란 핑계로, 했던 이야기는 할 수 있음에도 재방송하지 않았다. 어떤 장면이 말의 맥락을 잃고 글의 맥락으로 이해될 때, 아이들이 무엇을 우선하여 그 순간을 받아들일지, 사실은 그것이 두려웠다. 나의 문장이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담아둔 말에 담긴 조바심 또는 노파심을 모두 가지 친 뒤에 겨우 남은 조각만을 보였다. 그러곤 우리가 무엇을 향했는지 물으며, 가끔 슬퍼하기도 했다. 그때 전해 주었어야 할 말들을 뒤로 미룬 것이 게으름인지 아쉬움인지 이젠 헷갈린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씨 뿌리고 수확하지 못한 탓은 곡식이 아니라 농부에 있으리.
별개의 문제로, 아모르 파티를 이야기하던 그 아이를 회상하면, 단독자(單獨者)가 명찰처럼 함께 떠오른다. 그러다 연구실 오가는 길 학교 곳곳에 박혀 있는 청출어람의 상징을 보며, 썩 숙연해진다. 쪽이 발효되어야 푸른 빛을 내보인다는데, 나의 무엇이 너의 무엇이 되기까지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을까. 교사란 참 무책임한 직종인가 보다.